『삼명소식부(三命消息賦)』 2권 (서자평(徐子平) 주) 신(臣) 등이 삼가 살피건대, 『낙록자삼명소식부주(珞琭子三命消息賦注)』 2권은 송(宋)나라 서자평이 지은 것이다. 『낙록자(珞碌子)』라는 책은 녹명(祿命)을 말하는 자들이 비롯된 바이다. 그 법은 오로지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여덟 글자로 길흉화복을 미루어 헤아린다. 이숙(李淑)의 『한단서목(邯鄲書目)』에서 이르기를, 그 [이름은] '녹록(琭琭)하여 옥과 같고 낙락(珞珞)하여 돌과 같다'는 뜻을 취한 것인데 지은 자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주변(朱弁)의 『곡유구문(曲洧舊聞)』에서 이르기를, 세상에 전하는 『낙록자삼명부(珞琭子三命賦)』는 누가 지었는지 알지 못하는데, 서문을 쓰고 풀이한 자는 주(周)나라 세자 진(晉)이 지은 것이라고 여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부(賦)에서 인용한 바를 살펴보면 진(秦)나라 하상공(河上公)이 있다. 또 호리병을 걸고 지팡이를 변화시킨 일 같은 것은 모두 후한(後漢) 말 호공(壺公)·비장방(費長房)의 무리이니, 주나라 자진(子晉)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 책 앞에는 초이(楚頤)의 서문이 있는데, 또 낙록자는 도굉경(陶宏景)이 스스로 일컬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녹명의 설은 당(唐)나라 이허중(李虛中)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연·월·일로만 셈을 일으켰을 뿐, 이른바 팔자(八字)라는 것은 없었다. 굉경의 때에 또 어찌 이런 설이 있었겠는가? 살펴보면 그 책은 『송사(宋史)·예문지(藝文志)』에 처음 보인다. 그리고 조공무(晁公武)의 『독서지(讀書志)』에서도 선화(宣和)·건염(建炎) 연간에 이 책이 처음 유행하였다고 하니, 마땅히 북송 사람이 지은 것이다. 예부터 아무개라고 일컬은 것은 모두 가탁(假託)이다. 송나라 이래로 이 부에 주를 단 자는 왕정광(王廷光)·이동(李仝)·석담영(釋曇瑩) 및 자평의 네 사람이 있다. 자평의 사적은 상고할 수 없으나, 유독 명학(命學)으로 세상의 종주가 되어, 지금 팔자를 추산하는 자를 자평이라 일컫는 것은 대개 그 이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유옥(劉玉)의 『이학편(已瘧編)』에서 이르기를, 강호에서 명(命)을 말하는 자에는 자평(子平)이 있고 오성(五星)이 있다. 서로 전하기를 송나라에 서자평이라는 자가 있어 성학(星學)에 정통하였고 후세의 술사들이 그를 종주로 삼았으므로 자평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자평의 이름은 거이(居易)이고 오대(五代) 사람이다. 마의도자(麻衣道者)·진도남(陳圖南)·여동빈(呂洞賓)과 함께 화산(華山)에 은거하였으니 대개 기이한 사람이다. 지금 자평을 추산하는 이는 송말의 서언승(徐彥昇)이지 자평이 아니라고 운운하였는데, 그 설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술가(術家)의 말은 백에 하나도 참된 것이 없으니 또한 따져 물을 길도 없다. 그 주는 오랫동안 전하는 판본이 없고, 오직 『영락대전(永樂大典)』에 보이는 것이 아직 완질이다. 삼가 모아 엮어 상·하 2권으로 정리하여 『송사』 「예문지」의 옛 모습에 맞추었다. 그 가운데 운기(運氣)의 향배(向背), 금목(金木) 강유(剛柔)의 득실, 청적(靑赤) 부자(父子)의 상응을 논한 것은 말이 모두 이치에 가깝다. 간혹 옛 법이 지금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는 뒷사람이 잘 가려 택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또 살펴보니 『삼명통회(三命通會)』에도 『낙록자』 몇 마디가 실려 있으나 이 본과 전혀 맞지 않으니, 대개 원서가 흩어져 없어지자 명을 말하는 자들이 또 가탁하여 지은 것이다. 거짓 가운데의 거짓이니 더욱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며, 마땅히 이 본을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