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행(操行)에는 늘 한결같은 어짊이 있으나, 벼슬살이에는 늘 한결같은 만남[遇]이 없다.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재능이요,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때이다. 재능이 높고 행실이 깨끗하다고 해서 반드시 존귀해진다고 보장할 수 없고, 능력이 얕고 조행이 탁하다고 해서 반드시 비천해진다고 보장할 수 없다. 혹은 높은 재능과 깨끗한 행실을 지녔어도 [군주를] 만나지 못해 물러나 하류에 있고, 얕은 능력과 탁한 조행으로도 만나서 뭇사람 위에 있다. 세상에는 각기 선비를 취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고, 선비 또한 각기 나아가는 나름의 방식이 있다. 나아감은 만남에 달려 있고, 물러남은 만나지 못함에 달려 있다. 높은 자리에 처하고 현달한 곳에 거하는 것은 반드시 어질어서가 아니라 만났기 때문이며, 지위가 낮아 아래에 있는 것은 반드시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나면 혹 [더러운] 행실을 품고도 걸(桀)의 조정에서 존귀해지고, 만나지 못하면 혹 깨끗한 절개를 지니고도 요(堯)의 조정에서 비천해진다.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까닭은 한 가지가 아니다. 혹은 때마침 어진데 악한 [군주를] 보좌하고, 혹은 큰 재능으로 작은 재능을 따르며, 혹은 둘 다 큰 재능이나 도(道)에 청(淸)·탁(濁)이 있고, 혹은 도덕이 없으나 기예로 영합하고, 혹은 기능이 없으나 용색으로 총애를 받는다.
오원(伍員)과 백희(帛喜)는 함께 부차(夫差)를 섬겼는데, 백희는 존중받고 오원은 주살되어 죽었으니, 이는 조행은 다르나 군주는 같은 경우이다. 혹은 조행은 같으나 군주가 달라서 또한 만남과 만나지 못함이 있으니, 이윤(伊尹)과 기자(箕子)가 그러하다. 이윤과 기자는 재능이 대등하였으나, 이윤은 재상이 되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으니, 이윤은 성탕(成湯)을 만났고 기자는 상주(商紂)를 만났기 때문이다. 어진 이로서 어진 군주를 섬기면, 군주는 다스리고자 하고 신하는 어진 재능으로 그를 보좌하여 나아가고 버리는 바가 우연히 합치하니, 그 만남은 진실로 마땅하다. 어진 이로서 악한 군주를 섬기면, 군주는 다스리고자 하지 않고 신하는 충성스러운 행실로 그를 도우니, 조행과 뜻이 어긋나 만나지 못함이 진실로 마땅하다.
혹은 성현(聖賢)의 신하로서 다스리고자 하는 군주를 만났으나 끝내 만나지 못함이 있으니, 공자(孔子)와 맹가(孟軻)가 그러하다. 공자는 진(陳)·채(蔡)에서 양식이 끊겼고 맹가는 제(齊)·양(梁)에서 곤궁하였는데, 당시의 군주가 선한 이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재능이 낮고 지혜가 얕아 큰 재능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천리마를 부릴 수 있는 이는 반드시 왕량(王良)이고, 우(禹)·직(稷)·고요(皋陶)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 이는 반드시 요(堯)·순(舜)이다. 백 리를 모는 솜씨로 천 리를 달리는 발을 조련하면 반드시 멍에대가 꺾이고 멍에가 부러지는 우환이 있다. 머릿수만 채우는 신하[具臣]를 대하는 재능으로 대신(大臣)의 지혜를 부리면 반드시 마음이 닫히고 뜻이 막히는 변고가 있다. 그러므로 지극한 말이 버려지고 성현이 거절당하는 것은 성현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지극한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성현은 높은 것을 힘쓰니 지극한 말은 행하기 어렵다. 큰 재능으로 작은 재능에게 [벼슬을] 구하면 작은 재능은 받아들일 수 없으니, 만나지 못함이 진실로 마땅하다.
혹은 큰 재능의 신하로서 큰 재능의 군주를 만났으나 만남과 만나지 못함이 있으니, 우순(虞舜)·허유(許由)·태공(太公)·백이(伯夷)가 그러하다. 우순과 허유는 모두 성인으로, 함께 당(唐)의 세상에 태어나 모두 요를 대면하였다. 우순은 제왕의 계통을 이었고 허유는 산림으로 들어갔다. 태공과 백이는 모두 어진 이로, 함께 주(周)나라에 나와 모두 무왕(武王)을 뵈었다. 태공은 봉함을 받았고 백이는 굶어 죽었다. 현성(賢聖)은 도가 같고 뜻이 합하며 나아감이 가지런한데, 우순과 태공은 행실이 우연히 합하고 허유와 백이는 조행이 어긋난 것은, 태어남이 그 세상이 아니고 나옴이 그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가 비록 같으나 같은 가운데 다름이 있고, 뜻이 비록 합하나 합한 가운데 어긋남이 있다. 어째서인가? 도에는 정밀함과 거침이 있고, 뜻에는 청(淸)·탁(濁)이 있기 때문이다. 허유는 황자(皇者)의 보좌인데 제자(帝者)의 시대에 태어났고, 백이는 제자의 보좌인데 왕자(王者)의 세상에 나왔으니, 모두 도덕에 말미암고 함께 인의(仁義)를 드러냈다. 군주가 도덕을 행함이 맑지 않으니 머무르지 않았고, 군주가 인의를 행함이 높지 않으니 그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들이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요는 혼탁하고 순은 탁하며, 무왕은 잔학한 자를 주살하고 태공은 포악한 자를 토벌하였으니, 똑같이 탁하고 모두 거칠어 거동과 조처가 균등하게 가지런하였으니, 이것이 그들이 만난 까닭이다. 그러므로 순이 천하에 왕 노릇 할 때 고요가 정사를 보좌하였으나 북인무택(北人無擇)은 깊이 숨어 나타나지 않았고, 우가 천하에 왕 노릇 할 때 백익(伯益)이 다스림을 보좌하였으나 백성자고(伯成子高)는 지위를 버리고 밭을 갈았다. 고요의 재능이 무택보다 낫고 백익의 능력이 자고보다 뛰어난 것이 아닌데도, 고요와 백익은 나아가 쓰이고 무택과 자고는 물러나 숨었으니, 나아가 쓰인 이는 행실이 우연히 합하고 물러나 숨은 이는 조행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물러나 숨은 이는 형세가 달라 몸은 비록 굽혀도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군주는 그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를 버리는 뜻에도 한스러움이 없었으니, 이는 양쪽이 서로 사모하지 않은 것이다.
상앙(商鞅)이 진효공(秦孝公)에게 세 번 유세하였는데, 앞의 두 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뒤의 한 번은 채용되었으니, 앞의 두 번은 제왕(帝王)의 논이고 뒤의 한 번은 패자(霸者)의 의론이었기 때문이다. 제왕의 논을 가지고 패자인 군주에게 유세하면 비록 정밀해도 거절당하고, 다시 패자의 설로 바꾸면 비록 거칠어도 받아들여진다. 어째서인가? 정밀한 것은 효공이 얻기를 [원하지] 않는 바를 만났고, 거친 것은 효공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세는 [말이] 좋은 데 있지 않고 유세를 듣는 자가 그것을 좋게 여기는 데 있으며, 재능은 어짊을 기다리지 않고 섬기는 자가 그것을 어질게 여기는 데 있다. 마부[馬圄]의 말은 법도가 없으나 시골 사람이 그것을 기뻐하였고, 자공(子貢)의 말은 의리가 있으나 시골 사람이 듣지 않았다.
퉁소를 부는 악공[吹籟工]이 좋은 소리를 내었으나 월왕(越王)이 기뻐하지 않으므로 다시 야한 소리를 내니 월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원하지 않는 군주에게 좋은 것을 행하면 비록 좋아도 사랑받지 못하고, 좋지 않은 것을 원하는 군주에게 좋지 않은 것을 행하면 비록 좋지 않아도 미움받지 않는다. 이는 자잘한 기예로 영합한 것이니, 합하면 만나고 합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다. 혹은 기예가 없으면서 망령되이 간교함으로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여 또한 만나는 경우가 있으니, 비녀를 훔친 신하와 닭 울음을 낸 식객이 그러하다. 비녀를 훔친 신하는 자반(子反)에게 친근하였고, 닭 울음을 낸 식객은 맹상군(孟嘗君)에게 총애받았다. 자반은 도둑질하는 신하를 좋아하였고, 맹상군은 거짓[을 잘하는] 식객을 아꼈다. 군주에게 보탬이 있어 군주가 그에 의지하였으니 그 만남은 진실로 마땅하다. 혹은 보탬이 없으나 윗사람이 좋아하는 바가 되었으니, 적유(籍孺)·등통(鄧通)이 그러하다. 적유는 효혜제(孝惠帝)에게 총애받았고, 등통은 효문제(孝文帝)에게 사랑받았다. 자잘한 재능도 미미한 능력도 없었으나, 우연히 형체가 아름답고 골격이 우아하며 피부가 곱고 용색이 걸맞았다. 좋은 용모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이니 그 만남은 진실로 마땅하다. 혹은 추한 얼굴과 나쁜 용색으로 윗사람에게 사랑받았으니, 모모(嫫母)·무염(無鹽)이 그러하다. 모모는 황제(黃帝)에게 나아갔고, 무염은 제왕(齊王)에게 들여졌다. 그러므로 어짊과 어리석음은 미리 알 수 있으나, 만남은 앞서 도모하기 어렵다. 어째서인가? 군주의 좋아함과 싫어함은 일정함이 없고 신하가 나아가는 바는 미리 정해짐이 없어, 우연히 합하는 것이 옳은 것이 되고 마침 맞는 것이 뛰어난 것이 된다. 나아간 자가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고 물러난 자가 반드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니, 합하여 운이 좋으면 나아가고 운이 나쁘면 그것을 잃는다.
세속의 의론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은 [군주를] 만날 수 있으니, 만나지 못함 또한 스스로의 허물이다. 살면서 세상을 살피고[希世] 군주에 맞추며[准主], 다스림의 내막을 관찰하고 능력을 조절하며 유세를 정하고, 말을 살펴 기회를 만나 나아가서 군주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어찌 만나지 못함이 있겠는가?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무익한 능력을 짓고 보탬 없는 유세를 바치니, 여름에 화로를 올리고 겨울에 부채를 바치는 격이다. [군주가] 얻고자 하지 않는 일을 하고 듣고자 하지 않는 말을 바치니, 화를 당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어찌 복과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능력을 바쳐 유익함이 있고 유세를 바쳐 보탬이 있음은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그러나 혹은 보탬이 없는데도 도움을 얻고, 혹은 유익함이 있는데도 죄를 얻는다. 또한 여름철 화로로 젖은 것을 말리고 겨울철 부채로 불을 [일으키니], 세상은 살필 수 있으나 군주는 맞출 수 없다. 유세는 바꿀 수 있으나 능력은 바꿀 수 없다. 세상의 군주가 문(文)을 좋아하면 자기가 문을 하면 만나고, 군주가 무(武)를 좋아하면 자기는 만나지 못한다. 군주가 변론을 좋아하면 말재주가 있으면 만나고, 군주가 변론을 좋아하지 않으면 자기는 만나지 못한다. 문을 좋아하는 군주는 무를 좋아하지 않고, 무를 좋아하는 군주는 문을 좋아하지 않으며, 변론을 좋아하는 군주는 행실을 좋아하지 않고, 행실을 좋아하는 군주는 변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문장과 언변은 오히려 급히 익힐 수 있으나, 행실과 능력은 갑자기 이룰 수 없다. 배움을 오래 익히지 않으면 이름을 밝힐 수 없고, 이름이 평소 드러나지 않으면 군주를 만날 수 없다. 창졸간의 업과 잠깐의 이름은 날마다의 힘이 부족하여 미리 알려지지 않으니, 어떻게 군주에 맞추어 그 유세를 바치고 몸을 나아가게 하여 그 능력을 맡기겠는가? 옛날 주(周)나라 사람 가운데 벼슬하려 하였으나 여러 번 만나지 못하고 나이 들어 머리가 희어져 길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우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나는 벼슬하려 하였으나 여러 번 만나지 못하였고, 스스로 나이 들어 때를 잃은 것을 슬퍼하니 이 때문에 운다.”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벼슬함에 어찌하여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문(文)을 배웠다. 문덕(文德)이 이루어져 비로소 벼슬하고자 하였더니 군주는 노인을 쓰기를 좋아하였다. 노인을 쓰던 군주가 죽고 뒤의 군주는 또 무(武)를 썼으므로 나는 다시 무를 익혔다. 무의 절도가 비로소 이루어지자 무를 쓰던 군주가 또 죽었다. 어린 군주가 비로소 즉위하여 젊은이를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내 나이는 또 늙었다. 이 때문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하였다. 벼슬살이에는 때가 있으니 구할 수 없다. 세상을 살피고 군주에 맞추는 것조차 오히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절개가 높고 뜻이 오묘하여 이익에 움직이지 않고, 성품이 정해지고 자질이 이루어져 군주를 위해 돌아보지 않는 자이겠는가?
또한 만남이란 능력을 미리 마련하지 않고 유세를 미리 갖추지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기쁨을 만나고 윗사람의 뜻에 부딪쳐 맞으므로 이를 만남[遇]이라 한다. 만약 군주를 헤아려 유세를 조절하여 존귀함을 취한다면 이는 이름하여 헤아림[揣]이지 만남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봄에 곡식을 심으면 자라고 가을에 곡식을 베면 거둔다. 물건을 구하여 물건을 얻고 일을 하여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만남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구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르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만남이라 한다. 마치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고 들에서 버려진 것을 줍는 것과 같고, 하늘이 주고 땅이 낳으며 귀신이 돕고 신이 보좌하는 것과 같으며, 금식(禽息)의 정령이 몰래 경사를 주고 포숙(鮑叔)의 혼이 묵묵히 천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곧 만남일 뿐이다. 지금 세속 사람들은 만남과 만나지 못함의 논을 정하지 못하고, 또 만남에 나아가 그를 기리고 만나지 못함으로 인해 그를 헐뜯는다. 이는 드러난 효과에 근거하고 이루어진 일을 살필 뿐, 조행을 헤아리고 재능을 살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