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허중명서(李虛中命書) 1장 提要(四庫全書總目) · 번역원문+번역원문번역인쇄 창의 대상(프린터)에서 「PDF로 저장」을 고르세요. 휴대폰은 공유 → 인쇄 → PDF.

이허중명서 李虛中命書

舊題 鬼谷子 撰 · 李虛中 註
1장 提要(四庫全書總目) · 번역
원문: 위키문헌 등 공개 판본(교감본 아님) · 번역: AI 초벌 직역(검수 중)

提要(四庫全書總目)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 자부(子部) 7 제요(提要) 『이허중명서(李虛中命書)』 3권 술수류(術數類) 5 (주: 명서(命書)·상서(相書)의 부류) 신(臣) 등이 삼가 살피건대, 『이허중명서』 3권은 옛 판본에 귀곡자(鬼谷子)가 짓고 당(唐) 이허중(李虛中)이 주를 달았다고 적혀 있다. 허중은 자가 상용(常容)이며 위(魏) 시중(侍中) 이충(李冲)의 8세손이다. 진사에 급제하여 원화(元和) 연간에 벼슬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이르렀고, 한유(韓愈)가 그를 위해 묘지명을 지었는데 『창려문집(昌黎文集)』에 보인다. 후세에 성명(星命)의 학문을 전하는 자들은 모두 허중을 시조로 삼는다. 한유의 묘지명 가운데 '오행서(五行書)에 가장 깊어, 사람이 처음 태어난 해·달·날에 해당하는 일진(日辰)의 지간(支干)이 서로 생하고 이기며 쇠하고 죽고 왕(王)하고 상(相)하는 것으로 짐작하여 사람의 수요(壽夭)·귀천·이불리(利不利)를 추산하였는데, 번번이 먼저 그 해와 때를 정하면 백에 한둘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한유는 그 설이 넓고 깊고 아름다워 만 갈래 천 가닥이라고 극구 칭찬하였을 뿐 저술한 책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이 책의 이름이 없다. 『송사(宋史)』 「예문지」에 이르러 비로소 『이허중명서격국(李虛中命書格局)』 2권이 있고, 정초(鄭樵)의 『예문략(藝文略)』에서는 『이허중명술(李虛中命術)』 1권과 『명서보유(命書補遺)』 1권이라 하였으며, 조공무(晁公武)의 『독서지(讀書志)』에서는 또 『이허중명서』 3권이라 하였고, 초씨(焦氏)의 『경적지(經籍志)』에서는 또 『명서』 3권 외에 따로 『명서보유』 1권을 내었으니, 이름과 권수가 모두 뒤섞여 맞지 않는다. 세간의 전본은 끊긴 지 오래되어 그 같고 다름을 고증하여 바로잡을 길이 없다. 오직 『영락대전(永樂大典)』에 수록된 것은 그 글이 아직 대부분 완비되어 있고 권질의 앞뒤도 자못 차례가 있으며, 아울러 허중의 자서(自序) 한 편이 실려 있다. [그 서문에] 사마계주(司馬季主)가 호산(壺山)의 남쪽에서 귀곡자를 만났는데 [귀곡자가] 유문(遺文) 9편을 내어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논하였고, 허중이 여러 학자의 주석을 모아 책을 이루었다고 운운하였다. 책 속의 뜻과 체례를 자세히 살피면, 첫머리에서 60갑자를 논하되 사람이 태어난 시각의 간지에는 미치지 않으니, 그 법이 한유의 묘지명에서 말한 '처음 태어난 해·달·날'과 자못 부합한다. 그러나 후반은 사주(四柱)를 많이 일컫는데, 그 설은 실로 송대에 일어난 것이어서 앞의 글과 매우 어긋난다. 또 그 밖의 관직 칭호가 송대의 일에 많이 걸치니, 모두 허중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더욱 분명하다. 중간에 문필이 고아하고 난해한 것은 당나라 사람이 쓴 것 같고, 또 비루하고 천박하여 비웃을 만한 것은 후대에 덧붙인 것 같으니, 진위가 뒤섞여 나와 끝까지 따질 수 없다. 아마도 당대에 본래 이 책이 있었는데, 송대에 성학(星學)을 말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설을 그 사이에 끼워 넣고 허중의 주와 귀곡자에 이름을 가탁하여 스스로 그 술(術)을 신비화한 것일 뿐이다. 이제 그 의론이 정밀하고 절실하며 이치에 가까워 성명의 바른 뜻을 많이 얻었고 후대의 허황하고 황홀한 것과는 같지 않으므로, 조씨의 원래 목록에 따라 3권으로 정리하여 목록에 싣고 그 법을 보존하되, 가탁이 분명한 곳에는 각각 안어(案語)를 더하여 글에 따라 바로잡아 독자가 미혹되지 않게 한다. 9월에 삼가 교정하여 올린다.

총찬관(總纂官) (주: 신(臣)) 기윤(紀昀) (주: 신) 육석웅(陸錫熊) (주: 신) 손사의(孫士毅) 총교관(總校官) (주: 신) 육비지(陸費墀) 원서(原序) 옛날 사마계주(司馬季主)가 호산(壺山)의 남쪽에 살았는데, 어느 날 저녁 비가 갠 뒤 바람이 맑고 달이 밝을 때 한 노인이 문에 찾아와 스스로 귀곡자(鬼谷子)라 하였다. 계주가 그와 더불어 천지의 시작을 이야기하고, 하도·낙서(河洛)의 글과 기자(箕子)의 구주(九疇)와 문왕(文王)의 팔괘를 논하며 그윽하고 미묘한 것과 조화를 탐구하였다. 새벽에 이르러 [귀곡자가] 유문 9편을 내었는데, 삼재(三才)를 포괄하고 만물을 가리켜 펼친 것이었다. 계주가 이를 얻어 밝히니, 매번 사람의 화복과 시수(時數)의 길흉을 말하면 응함이 신과 같고 살핌이 합당하여 당시에 귀하게 여겨졌다. 이제 내가 그 옛 글을 얻어 상고하니 자못 증험이 있었다. 다만 세월이 오래되어 편목의 차례가 어긋난 듯하나, 오행의 요체는 아직 갖추어 실려 있기도 하다. 나는 그 본래의 술이 장차 사라질까 두려워 여러 학자의 주석을 모아 책을 이루었으니, 감히 빠진 글을 보충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선 길이 전하려는 것이다. 고명한 군자는 나를 꾸짖지 말기 바란다. 당 원화(元和) 초재(初載) 9월 13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상용 허중(李常容虛中)이 서(序)한다. 안(案): 당대에는 오직 천보(天寶)에서 지덕(至德)까지만 '재(載)'라 일컬었는데, 이 서문은 원화 이후인데도 '재'라 일컬으니, 이것이 곧 위작의 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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